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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October 9, 2015

‘더글라시즘’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 킴킴 갤러리와 그의 친구들 / 이상길

‘더글라시즘’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킴킴갤러리와 그의 친구들
이상길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1.
그는 나의 오랜 친구다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동안 자주 만났다거나 서로의 속사정을 털어놓고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니다굳이 따져보진 않았으나우리가 실제로 만난 횟수라고 해봐야 줄잡아 수십 번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그러니 그저 ‘구면’이라거나 ‘지인’이라고 써야 할까하지만 난 그를 예전에나 지금이나 친구로 생각한다그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아마 그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우정이 꼭 수다스러워야 할 필요는 없다벤야민은 어디선가 자기와 아도르노 사이의 우정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만 지속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이를 약간 비틀어나는 그와 나 사이의 우정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지속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남들은 너무 데면데면하다고 여길 지도 모를 이 관계가 내겐 무척 소중하다.뒤늦게 깨달은 점인데우리는 ‘어릴 때 친구’인 것이다. 20대 중반에 서로 알게 됐으니나름대로 머리 크고 나이 들어 만났다고 볼 수도 있겠다그런데 구태여 그 시절을 어렸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제 우리가 그것을 20년 전 일로 회상해야 하는 나이에 들어섰기 때문만은 아니다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때 우리 모두가 ‘학생’이었기 때문이다이를테면우리는 한창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중이었다그 과정의 어떤 단계에서 그 ‘사람’은 ‘연구자’또는 ‘예술가’라는 사회적 이름을 부여받게 될 것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제도적 정체성 규정의 절차에 따르는 미래를 크게 의식하며 지냈던 것은 아니다그는 그대로나는 나대로지금보다는 훨씬 더 무정형의 상태로단지 바쁘게 배우고만들고움직이고 있었을 따름이다.
우리가 유학했던 1990년대의 파리는 멋진 곳이었다. 1990년대 초반실업률이 15%를 넘나들고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은 점점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지만그래도 시민사회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이어 무너지고 보스니아 내전이 벌어졌던 때라파리는 난민이민자망명객들로 들끓었다길거리에는 구걸하는 거지와 집시노숙자들이 유난히도 많았다그 무질서하고 어수선한 느낌이적어도 이방인이었던 내게는묘한 자유와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1995년에는 좌우동거정부의 복지제도 축소에 맞선 총파업이 일어났다기약 없는 교통대란이 이어졌고정장 차림에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낯설어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정부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노동계가 승리했고 시민들은 환호했다그들 틈에 우리도 끼어있었다무엇보다도 프랑스 사상계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던뛰어난 지식인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었다레비-스트로스부르디외데리다보드리야르투렌 등등그들의 신간이 나왔고종종 논쟁이 벌어졌다.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선 그들의 인터뷰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때로 그들의 강의나 강연에 직접 참석할 기회도 있었다그 ‘좋았던 옛 시절’은 우파 정권이 들어서고 이민법이 야박해지고 극우정당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지지율이 올라가면서그리고 가타리드보르들뢰즈료타르 같은 이들의 부고기사가 차례로 쌓여가면서 조금씩 저물어갔다사실 잔치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우리는 너무 늦게 도착한 초대장을 손에 쥐고서 제 흥에 겨워있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최영미그와 나는 ‘문민정부’가 겨우 첫걸음을 내딛고 ‘프랑스 사상’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이국에서 날아온 유학생이었던 것이다.
2.
언젠가 그의 집에 놀러갔던 날나는 그즈음 막 서점에 깔린 부르디외와 한스 하케(Hans Haake)의 대담집을 선물로 챙겼다책을 받아들고는 활짝 웃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우리는 무언가 간단한 것들을 먹으며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포스트모더니즘’이 어쩌니 ‘시뮬라시옹’이 저쩌니 하는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다대단한 지식은 없어도 진지함만은 차고 넘치는 20대 특유의 대화가 그렇게 중구난방 이어졌다그가 보드리야르에 흥미가 있다고 지나치듯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그 인상이 오래 남아서였는지그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졸업작품전에 갔을 때나그의 최근 작품도록 <쓰바 레알Unfucking Real>(2012)을 보았을 때도 난 보드리야르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물론 그는 이런 류의 ‘해석과 참조의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나 역시 예술가의 수학 시절 흔히 있을 법한 지적 관심을 어떤 영향의 계보 구축에 동원하면서얼치기 평론가 흉내를 내볼 요량은 조금도 없다하지만 그의 작업을 볼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우리가 이십년 전 주고받았던 이야기의 희미한 추억이 용수철 달린 악마인형처럼 불쑥 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일상의 사물과 그것을 둘러싼 구체적 공간에 대한 그의 각별한 취향그리고 쾌활하면서도 집요한 변형과 재구성의 시도를 앞에 두고나는예를 들면보드리야르의 ‘가제트(gadget)’ 같은 개념을 곱씹게 된다“소비사회에서의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자 “기호로서의 기능을 위해 객관적 기능(도구성)을 상대적으로 없애버린 사물”로서의 가제트보드리야르에 따르면“가제트는 일상생활을 스펙터클로 만들어버리는 체계의 논리의 일부이며그 결과 이 논리는 사물의 환경더 나아가서는 인간적 · 사회적 환경 전체에 인공적 성격 및 속임수 성격그리고 무용성을 덧붙인다가장 넓은 의미의 가제트는 사물이 본래 갖고 있는 목적성 및 유용성의 전면적 위기를 사물의 유희성의 양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그렇지만 가제트는 장난감이 아이들에게 주고 있는 상징적 자유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도달할 수도 없다.” 근본적으로 그가 소비사회의 가제트에 보내는 시선에는 경멸 아닌 매혹,또는 아이러니가 담겨있는 듯싶다그 핵심적인 이유는 아마도 가제트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슬쩍슬쩍이나마 시시때때로 폭파할 수 있는 잠재력을 탑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가제트와 장난감 사이 어디쯤에 놓일 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가지고 놀 수 없는그러니까 유용성을 상실한 장난감이라는 점에서 가제트와 닮았지만그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어떻게든 재맥락화가 가능한한마디로 상징적 자유에 도달한 가제트라는 점에서는 차라리 장난감에 가까운.
3.
파리에서 그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기억한다퐁피두센터 근처 어떤 극장 앞길게 늘어선 관객 줄 가운데 영화를 보러 온 내가혹은 그가 서 있었다. <오프닝 나이트>, 아니 <영향 아래의 여자>였던가카사베츠의 영화가 걸려있었던 것 같다예정에 없던 잠깐 동안의 마주침이었지만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그 때는 그것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그를 다시 만난 것은 경기도 미술관에 라리사 효스(Larissa Hjorth)의 전시회를 구경 갔을 때였다거의 10여년 만이었을 것이다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가진 기대치 않은 재회였던 탓에 우리는 무척 놀랐고 그만큼 기뻐했다이후 가끔씩 그는 나를 이런저런 전시회에 초대했고나는 친구 집에 놀러가듯시간이 맞을 때또는 마음이 내킬 때 부담 없이 그와 관계된 전시회에 들리곤 했다그가 내게 더글라시즘(Douglasism페스티벌에 참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 온 것은 올 봄의 일이다.
두어 차례 메일을 주고받은 우리는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 만났다갤러리 한 구석에서 로베르트 에스테르만(Robert Estermann) <사색적 평면(Speculative plane)>이 하얀 혓바닥을 내밀고 있었다그는 내게 더글라시즘의 기획의도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무언가 함께 할 수 있으면 재미있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담아그는 아마도 강연이나 비평의 형식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싶다그 제안을 회피하는 동시에 내 나름의 방식으로 수락한 결과가 바로 이 글인 셈이다그 제안을 회피한 이유는 자명하다난 비평가가 못 된다전형적인 범주의 미술비평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이 내겐 없다너무 높은 곳에 주렁주렁 열린 포도송이 아래를 지나가는 여우 식 심보에 불과하겠지만텍스트 중심적인 예술비평은 딱히 내 관심사도 아니다그럼에도 내가 예술과 연관된 비평 비슷한 에세이를 몇 편 쓴 적이 있다면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작품을 빌미삼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또 마침 그렇게 할 수 있어서였다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 있지 않을까만일 그렇게 된다면내가 쓰는 글은 모호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더글라시즘과 관계없진 않으면서도그것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비평은 딱히 아닌사실 그의 더글라시즘 페스티벌 구상을 들으며난 그 밑에 깔려 있는 몇몇 모티브에 관해 말해보고 싶어졌다그가 운영하는 킴킴갤러리는 왜 그러한 작업을 계획했는가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 나름대로 추론해간다면이는 결국 킴킴갤러리그러니까 그에 관해 말하는 일이 될 것이다나는 그것이 더글라시즘 페스티벌에 개입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했다더글라시즘에 대한 내재적이고 미학적인 사후비평이 아니라지극히 외재적이며 주변적인 사전인상기혹은 영리한 홍보문이것은 킴킴갤러리가 표방하는 ‘비정규 마케팅(unconventional marketing)'에도 잘 맞아떨어지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4.
그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문화사조(-ism: 정신적 정치적 문화사적 활동이라는 뜻에서)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상대적으로 경직되고 상업적인 문화시대인 21세기에 킴킴갤러리가 서울에서 여는 더글라시즘 페스티벌은 작가인 더글라스 파크(Douglas Park, 1972년 영국생)를 중심으로 1990년대 초부터 진행되어 온 여러 나라 작가군들의 교류여기서 파생된 작품 수백 점을 연구발표하는 기획이다더글라시즘은 더글라스 파크가 참여하고그를 촉매로 한 작품들의 다양성개방성의 극대화가 일으키는정치적 뜻보다 더 강한 의미로서의 문화적 이즘(-ism)을 실험한다더글라시즘 페스티벌은 서울 각지의 전시장대안공간상영관문화원공공장소에 이르는 다양한 장소에서 열릴 예정이며미술영화출판음악 등의 여러 장르를 망라하고작가 30여명국내외 예술기관들이 참여하는 페스티벌이다킴킴갤러리는 더글러스 파크라는 인물과 그가 속한 문화를 다소 거리가 먼 서울에서 다양하고 열린 내용의 페스티벌로 개최한다.” 킴킴갤러리는 그가 2008년부터 실험해온 새로운 유형의 ‘갤러리-작업’이다그것은 일정한 공간을 갖추지 않은 채 기획의도에 따라 그에 맞는 장소와 전시 형식을 취하면서 현대미술의 구조에 개입한다내가 킴킴을 굳이 그의 ‘갤러리-작업’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작가 선정과 전시 기획그리고 ‘장소’의 선택에서 예술에 대한 그의 시선감각취향한마디로 어떤 정서적 태도(ethos)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글라시즘에 관해 더 이야기하기 위해우리는 초여름 신촌에서 다시 만났다그는 자기 키를 훌쩍 넘는 작업용 종이를 돌돌 말아 안고 있었다우리는 따가운 저녁 햇살을 견디며 천천히 걸었고차갑고도 질긴 냉면을 같이 먹었으며심심하게 앉아 차를 마셨다그는 몇 해 전 런던에서 머무는 동안 더글라스 파크를 알게 되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나로서도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예를 들면미술계에 흔치않은 노동계급 출신이면서 예술사에 남다르게 해박한 지식을 갖춘 전방위 예술가이고다방면의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그랬다그에 따르면더글라스 파크는 스스로를 “시각예술가, (대부분 예술과 관련된 문학적 산문과 비평문을 쓰는작가큐레이터”라고 소개하는데실제 그가 하는 일은 배우나레이터까지를 망라한다이 작가가 평소에 주로 하는 일은 카페에서 자작 텍스트를 낭송하는 퍼포먼스다그는 지난 20년간 숱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창작에서 부수적이거나 보조적인 역할을 맡는 식으로 많은 작업을 함께 해왔는데정작 자신이 중심에 있었거나 중요하게 인정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 작가가 수십명의 다른 작가들과 공조한 작품 200여 점을 한데 전시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그것은 마치 동일한 식자공의 손을 거쳤다는 이유로 이질적인 저자의 책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한다거나특정한 단역 전문배우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장르나 스타일이 제각각인 영화들을 한 묶음으로 상영하는 행사처럼 흥미진진한 시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예술사회학자 하워드 베커(Howard Becker)는 예술세계가 무엇보다도 협력적 연계(cooperative links) 속에서 복잡한 노동분업에 따라 이루어지는 집단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바 있다시 쓰기 같이 상대적으로 독자성이 강한 예술행위조차 출판을 겨냥한다면 편집자라든지 디자이너인쇄공 등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하물며 영화나 공연처럼 통상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접속하고 협업하지 않으면 제작 자체가 어려운 예술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현대미술은 점점 더 영화나 공연을 닮아간다물론 노동분업 과정에서도 ‘핵심 활동’을 맡는 ‘예술가’가 있으며그 밖의 사람들은 조력자 내지 보조인력(support personnel)으로 여겨진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핵심활동의 수행자만이 예술가나 창작자의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거나 미학적 결정을 온전히 주도한다거나 아니면 예술작품의 성취를 독점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는 일종의 사회적 고정관념 내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이러한 관점에서 그동안 이리저리 흩어져 제각기 다른 ‘작가’에게 속해있었던 다양하고 이질적인 작품들이 더글라스 파크라는 ‘보조인력’을 꼭짓점으로 이어진다면 과연 어떤 미학의 계열이 새롭게 가시화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것이다.
5.
그는 내게 더글라스 파크가 지금껏 유명해질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형체 없는(intangible) 작품’을 생산해왔기 때문이라고 일러 주었다내가 처음 문화생산의 물질성이라는 문제를 머릿속에서나마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된 것은 유학시절 노베르트 엘리아스(Nobert Elias)의 전기적 인터뷰를 읽으면서였다. <모차르트-천재의 사회학>이라는 저서를 유작으로 남긴 이 독일 사회학자는 1938년과 1939년에 <문명화 과정> 1, 2권을 출간했다한데 훗날 자신의 명성을 전 세계에 떨치게 해줄 이 대표작들의 출판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엘리아스는 그 책들을 아버지의 재정적 도움을 얻어그나마 스위스의 한 출판사에서 간신히 출간할 수 있었다더 씁쓸한 경험이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연히 그 출판사를 방문했을 때 엘리아스는 사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당신 책들 때문에 내 지하창고가 꽉 차있습니다그것들을 헐값에 처분해도 될까요아무도 그 책들을 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들’이 팔리지 않은 채 어느 외진 곳 창고에 잔뜩 쌓여있는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상상해본 적 없던 내게 인간 ‘정신’의 소산인 책이 또한 얼마나 지독하게 ‘물질’인지를 일깨워주었다예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의 생각이라면그것은 또 우리가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의 사물이기도 하다더욱이작가나 학자에게 책이 그렇듯이예술가에게 객체화된 작품은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의미할 것이다예술의 ‘불멸가능성’그리고 ‘환금가능성’.
사물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고 남는다반면 더글라스 파크가 벌이는 즉흥 퍼포먼스처럼 물적 실체로 고정되지 않은 예술은 금세 덧없이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설령 그것이 작가의 의도와 계산에 따른 것이라 해도실제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물질이야말로 금방 휘발해버릴 위험이 있는 미술작가의 사유를 형상 안에 정박시켜주는 미학의 닻이다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예술작품의 현전과 견고한 물질성이 불러일으키는 영속성에 대한 기대야말로 헛된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예술가가 죽고 나서 얼마 뒤면 대부분의 작품이 쓰레기로 전락하고, 50년이 지나면 작품들 가운데 90%가 소멸한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말이다한편 물질은 적어도 아직까지는-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 수 없지만예술이 환금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도 하다따라서 미술작가가 물리적 작품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제적 수입의 기반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는 뜻이다이는 어쩌면 작품의 불멸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가난은 예술가 자신이 끊임없이 온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삶의 여건이기에 그렇다오래전에 내가 만난 적이 있는 한 설치미술가는 상당히 유명한 작가였는데도 다음 작품의 제작비용을 마련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그는 예술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이래 돈 걱정과 이사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일반적으로 예술노동자는 같은 연령대의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평균 소득수준이 낮고실업률 · 빈곤률이 높다.고용은 대개 자가고용프리랜서비정규직의 형태를 띠다 보니수입의 변화도 심하다그는 복수의 직업을 갖든지 아니면 사적(배우자가족친구) ․ 공적(재단기업정부후원을 받아 생활을 꾸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사회학자나 경제학자들은 그러한 빈곤의 원인으로 승자독식 현상이 강한 예술시장의 특성이라든지예술가의 자만심자기기만위험감수 성향 등을 꼽는다이유야 어쨌든이처럼 경제적으로 힘든 환경에서 예술가에게 ‘팔 물건’조차 없다는 것은 비밀이 없다는 것만큼이나 쓸쓸한 노릇일 터이다그럼에도 예술가가 계속 자청해서 ‘팔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면이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내 질문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가난하지만 호사스러운 것”이라고이 때호사스럽다는 것은 예술가가 경제적 곤란에도 아랑곳없이 부릴 수 있는 ‘정신적 사치’를 가리킬 것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상징적인 보상(동료들로부터의 인정사회적 명예와 존경), 또는 내적이며 심리적인 보상(만족감자부심사명감)을 추구하는 식으로 말이다.
6.
큐레이터 클라우디아 페스타나(Claudia Pestana)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킴킴갤러리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재창조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그것은 개별 예술가의 작업을 장소그리고 전시방법과 잘 맞춤으로써 세 요소를 조밀하게 연결시키는데이는 따분한 생산성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기술과 방법의 이전을 통해 예술가에게 다시 힘을 북돋워주기 위해서이다.” 정서영성낙희와 성낙영제프 게이블(Jeff Gabel), 로베르트 에스테르만 등이 그의 이러한 작업에 동참했고더글라스 파크가 그 명단에 새로이 이름을 올렸다나는 이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그러니까 킴킴갤러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예술가들을 선택하는가내 질문에 그는 약간의 망설임과 더불어 “예술가들의 예술가가 아닐까” 하고 반문했다대중보다는 동료들을 의식하며 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예술가자신이 속한 전통에서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기를또는 옆으로 영영 샐 수 있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예술가그러한 예술가 부류는 무엇보다도 그가 말한 의미에서 ‘호화롭게 사치하는 태도’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한데 어떤 사회학자라면 ‘상징자본의 추구 성향’이라고 간단히 뭉뚱그려 규정할 법한 이 태도는 좀 더 섬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그것은 단순히 예술가가 ‘단기적으로’ 경제자본의 획득을 희생하는 대신‘장기적으로’ 상징자본의 축적을 겨냥하는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오히려 나는 그 태도의 요체가 예술가의 ‘초단기적인’ 혹은 ‘즉시적인’ 경험 지향성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창작행위의 결과물로서 작품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줄 경제적 수입에 대한 기대는 상징적 보상에 대한 기대보다야 ‘단기적인’ 것일 수 있어도작업 중인 예술가에겐 그래봤자 ‘장기적인’ 지평에 놓이는‘한참 먼 훗날’의 문제일 것이다그렇다면 ‘예술가들의 예술가’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그리하여 그들의 창작행위를 진정으로 추동하는 것은 상징자본의 추구 못지않게혹은 그보다 훨씬 더창작과정에서의 사회적 교환과 상호작용을 통해 경험하는 ‘즉각적인’ 감정과 만족일지도 모른다더글라스 파크같은 예술가들이 물리적 ‘작품’의 생산을 일정하게 포기하고 또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면이 역시 그들이 작품의 생산과정 속에서 이미 스스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자신의 역할이 크고 작은 것과 관계없이 창작을 위해 다른 이들과 협업하는 과정그 수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수용자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과정그리고 구체적인 상황과 장소와 분위기를 매개하며 무형의 작품을 구축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예술가들의 예술가’들이 작품의 영속성과 환금성을 부차적인 어떤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거나예술에 대한 헌신과 몰입을 더욱 각별히 드러내는 이유도 그와 같은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이는 다시 그들이 서로 간에 동료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정서적 토대로 작용한다동일한 자원-경제자본이든 상징자본이든-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는 데서 나오는 직업적 동류감이 아니라각기 다른 개인들이지만 유사한 가치-새로운 경험이든 감정이든 창작이든-를 지향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하는 연대감이 그것이다“왜 더글라시즘을 구태여 서울에서 개최해야 하는가?” 누군가 그에게 물어온다면그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예술가들의 예술가’들에게는 작가나 작품의 국적지리적 경계문화적 소속 따위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그들에겐 예술의 가치에 대한 신념과 예술세계의 보편적 확장 가능성에 대한 상상말하자면 일종의 결연한 미학적 국제주의가 있다고.
7.
그와 나는 오랜 친구다나는 유학시절 그로부터 예술을 배웠다물론 그가 내게 무언가를 직접 가르쳤다는 말은 아니다그는 내게 준 이런저런 영향을 의식조차 못할 것이다하지만 미술에 호기심은 없지 않았으나 작가나 작품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던 내게 그와의 교분은 미술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들어준 소중한 계기였다그와 그의 친구들을 따라 에콜 데 보자르를 드나들며단편적이나마 그들의 작업과정을 지켜보며그들과 커피를 마시거나 잡담을 나누며또 그들에게 자극받아 전시회를 구경 다니며 나는 학교에서 들었던 미학이나 사회학 강의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그는 정치적인 문제를 화두로 삼거나 사회적인 발언을 드러내어 시도하는 작가는 아니다. 1980년대에도 그는 학생운동에 거리를 둔 채 자기 작업에만 전념한전형적인 ‘미대생’의 학창시절을 보냈다그래서인지 나는 그가 자신의 교육배경과 작품 사이의 관계에 무심코 사회학적 촉수를 들이댔을 때그 의외의 직관력에 내심 놀랐다그는 내게 자신이나 자신의 동세대 작가들이 모두 “결국엔 배운 것을 만들고 있어서 시시하다”고 말했다‘비정치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흔히 갖기 쉬운예술가의 ‘자유의지’와 ‘창조적 재능’의 이데올로기를 그는 내면화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흥미롭게도 그는나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유학을 오고 나서야 이른바 ‘동시대(contemporary) 미술’을 제대로 접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그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파리뉴욕에서 런던베를린뮌헨 등지로 유학의 경로는 변화했으며 유학생들 또한 많아졌다하지만 그들이 국내에서 자기를 가르친 선생의 추천에 맞추어 유학을 가고국내에 돌아와선 유학한 곳의 선생에게 배운 대로 작품을 만드는 패턴은 여전하다.
아마도 그의 사회학적 관찰은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개인적’ 작업에 몰두하는 예술가로서 그가 성찰의 어느 단계에서 예술의 ‘사회적’ 차원에 눈을 돌리게 되었듯이예술의 ‘사회적’ 존재양식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로서 나는 점점 더 그것의 ‘개인적’ 차원에 시선을 주게 된다예술사회학자 피에르 솔랭(Pierre Sorlin)은 예술가의 본성재능천재성 같은 낡은 관념들을 거부하면서도‘사회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예술가와 창작행위의 어떤 면모를 가리키기 위해 ‘특이성(étrangeté)’이라는 용어를 쓴다특이성은 예술가들만이 가지는 속성은 아니다이를테면엄청나게 빨리 뛰는 사람몇 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 등에게도 특이성이 있다인간의 이 낯선이상한기묘한특별한 부분은 ‘사회적인 것’을 빠져나가고 모든 규칙성을 무시하며 어떤 법칙으로도 감싸지지 않는다그리하여 솔랭은 이렇게 단언한다“사회학은 예술에 대한 관계의 명백히 집합적인 양상들을 규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창작이 구사하는 매력은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의 의의는 어쩌면 외적인 분석과 해체의 막다른 지점에서 더 이상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예술의 진정한 매력을 대면하게 해준다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도끼질하다/향기에 놀랐다네/겨울나무 숲”(요사 부손)
그는 킴킴갤러리를 매개로 예술가들 사이에 “지금은 잊힌 우애의 공동체”를 복원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더글라시즘의 국제주의 역시 아마도 그러한 의지의 일환일 것이다‘구축’이 아니라 ‘복원’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그를 보며나는 “그렇다면 예전에는 그런 것이 정말 있었단 말인가”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질문을 내가 실제로 입 밖에 냈는지아니면 마음속으로 삼켰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그의 답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도 그가 아무 말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내가 잊어버렸기 때문인지 이제는 알 수 없다어쨌든 중요한 점은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나는 생각한다그에게 “우애의 공동체”에 관한되살릴만한 어떤 기억과 경험이 있다는 것은그가 그것을 위한 여정을 계속해나가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시장 영역과 후원 영역 모두에서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되고 상업화의 압박이 날로 심해져만 가는 미술계에 그러한 이상이라니과연 실현가능한 일인가공간도 없는 갤러리상업성도 없는 작가들 몇 명이 ‘예술’을 탐하며 모였다 흩어졌다 운동한다고 해서“나비의 날개/몇 번이나 넘는가/담장의 지붕”(마쓰오 바쇼)

Oct. 2013
Seoul

Wednesday, January 8, 2014

Clemens Kruemmel : Speech is matter, and Thinking like a stone

Lecture
11th October 2013
Ilmin Museum of Art, Seoul
Translated by Yeojeong Chun  
번역 전여정


Hi. Good afternoon. My name is Clemens Krümmel.
안녕하세요. 클리멘스 크뤼멜 입니다.

I am an art historian, writer, translator - and sometimes I also work as a curator.
저는 미술사가, 저술가, 번역가이며 가끔 큐레이터로도 활동합니다.
I am speaking to you from Berlin in Germany.
이곳 독일 베를린에서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Before I start my short presentation, I first want to thank Gregory Maass and Nayoungim
먼저 그레고리 마스와 김나영에게
for inviting me to talk about the subject, the object of your conference.
주제에 관해 나눌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Mr. Douglas Park.
또한 더글라스  파크씨.
I apologize for not being able to be present with you out there in Seoul
서울을 방문하여 함께하지 못한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health reasons have prevented me from flying there this time.
건강상의 문제로 참여가 어려웠습니다.

But I already had the opportunity to give a video presentation in Seoul on one other occasion,
하지만 저는 이미 서울에서 영상을 통해 여러분을 적이 있고
yet – let me tell you that I am still looking for a good way to work with this medium.
현재도 영상을 이용한 좋은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So please bear with me as I stumble along the path I have set for myself.
저의 실험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My talk has the title Speech's Matter.
강연 주제는 언어소통의 중요성 입니다.
When Greg and Nayoung drew my attention to the works of Douglas Park,
그레고리와 나영이 더글라스 파크의 작품을 보여주었을때
whom I have until today never met in person, I was immediately hooked.
아쉽게도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매우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To say that I have always been interested in "immaterial" art productions would be misleading,
제가무형예술에 빠져있었다고 한다면 잘못된 표현이겠죠
because everything that matters needs at least temporarily a material support.
모든 것은 어떤 형태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Douglas Park, who works not only with texts 
(in a degree of intensity that you could call him a writer) 
but mostly and especially with words,
텍스트 뿐만 아니라 주로 그리고 특별히 단어로 작업하는 더글라스 파크는 처음에는  
인상에
first seemed to me to be an adherent of that uncontainable craze for what many people 
in the art field nowadays like to call "performance lectures".
요즘 예술계의 많은 이들이퍼포먼스 강연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폭발적인 
지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Indeed, like many of the artists who work in that self-moulded interstitial space between 
artistic speech and academic speech,
물론 더글라스 파크는 학계와 예술계 사이를 넘나드는 많은 작가들같이
Park is highly conscious of his ancestors.
선조에 대해 강한 의식이 있습니다.

But unlike many,
그러나 그가 주류와 다른 점은
he does not bob up and down like a nervous pimp
심난한 영혼마냥 난리를 치며
trying to correctly spell out his triad background to some youngsters who are coming on to him,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다국적 배경을 강요하지는 않는 겁니다.
he does not merely indulge in the Old Name Game,
그는 과거와 현재의 작가들에 대해 쓰며
when he writes about older and contemporary artists,
이름이나 한참 나열하는 짓은 하지 않죠    
it always remains very clear that he is acting out an investigative impulse
모방하기보다는
rather than a mimetic one.
분석적인 감각의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Even if his approach seems erratic and unsystematic at times,
가끔 그의 접근이 변덕스럽거나 비체계적이더라도,
even if he makes up a maze of uncheckable factoid connections
또한 예술가, 발상과 작업 사이에
between artists, ideas and practices,
확인불가능한 연관가능성을 마구 만들더라도
his historical consciousness is wide awake.
그의 역사적 인식은 훌륭합니다.

Sometimes, some significant times,
그것은 몇가지 중요한 사례에서 보듯
it sees a takeover from the world of systems and structure, the world of language,
체계, 구조, 언어의 세계를 모두 아우르는데
but not only in a traditional poetic sense,
기존의 시적인 방식 뿐만 아니라
but in the sense of signal-to-noise,
신호 잡음비의 식으로
of the semiotic adventures of speech.
언어의 기호론적 모험으로 다가갑니다.

"Spoken word", a genre that has haunted the West since the 1980s,
서양이 1980년대부터 부담을 느껴온 장르 “Spoken word”로는
appears only half appropriate as a description
더글라스 파크의 구어 바탕의 퍼포먼스를
of what goes on in Douglas Park's speech-based, performative works.
완벽히 설명할 없습니다.

Whoever has read one of his paratactic texts,
그의 단순 나열된 텍스트와
has watched him battle his acoustic environment in amplified speech,
증폭된 언어로 음향적 환경을 살펴나가는 방식이나
whoever has listened to words being transported into and out of his mouth
그가 순간순간 텍스트를 읽을
moment after moment when he reads one of his texts,
단어들이 그의 입속에서 들어갔다 나오거나
will have noticed that he or she was not witnessing a "reading".
하는 것을 목격한 이들은 그것이읽는행위는 아닌 것을 있을 것입니다.

Instead, Park's articulate attitude encourages us
오히려 더글라스 파크의 분명한 태도는
to focus on single elements of words,
단어
on vowels, syllables, words, composites,
모음, 음절, 단어, 복합적인 요소들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유도합니다.
which only in one portion of his work accumulate to sentences and paragraphs.
그의 작품 부분에서만 이것들이 축적되어 문장과 문단이 됩니다.

It seems banal to say that modernism has since its beginning paired the scrutiny of reason
모더니즘이 정밀한 논리와 언어로의 표현에 대한 반감을
with a heavy grudge against the use of language as a power tool.
엮었다고 한다면 시시한 표현인 같습니다.

In Park's works, language is under a general suspicion.
더글라스  파크에게 언어는 기본적으로 경계대상입니다.
When it comes to trusting into language, count him out.
언어에 기댄다? 그는 아닙니다.

The paratactic approach that he uses when he reads out,
그가 소리내어 읽을 때의 병렬적 접근은
to not only expand into the notional and phatic spaces that speech offers,
구어의 개념적, 의례적 면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but also to line up words, the sound, their facture, their texture,
단어와 소리, 골절, 감촉을 제시하는
like pearls on a shaky string - in TIME,
시간 흔들리는 줄에 매달린 진주와 같습니다.

I claim that it is a meaningful component of his mastery
저는 이것이 소리를 모호하고 수상쩍게 만드는
to make words sound like something extremely equivocal and even fishy.
그의 우월한 능력에 있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It always remains a speaking act,
그것은 항상 소리내어 말하는 행위,
not in an emphatic sense (in which articulate speech always only appears as a tool of 
empowerment of a subject),
파워풀한 연설에서 오는 강요하는 느낌보다는
but rather in the sense of speech as a tool of caution.
신중함을 바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By taking out, or leaving out, most syntagmatic grammatical elements that usually 
regulate the
서양의 언어에서 두드러지는 문장이나 문장 조립적인 부분
economy of power in spoken and written language,
언어 에너지의 흐름을 주관하는
especially in Western languages, by avoiding larger sentence and sub-sentence constructions,
통합적인 문법을 가감하며
he carves out of language what really makes it tick, what really gives it its power over people:
더글라스 박은 사람들이 언어 속의 무엇에 진짜 영향을 받는 드러내죠
the incredible situational power of the continuously moving and elusive present,
항상 변화하고, 잡을 없는 시공간의 현재
the ungraspable present tense of time-space.
그것의 엄청난 파워를 말이죠

I think musicologists first seriously presented the common observation that
아마도 음악 연구가들은
when we hear, when we listen, when we perceive what has always been explained to us as 
"external" sensory "data",
우리가 소리를 듣는 외부적인 정보라고 알려진 것을 접할
we are uneasily sitting on an almost inconceivably small plateau
금방 까먹을 있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다는 점을
that is floating between clouds of forgetfulness.
먼저 발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Our focused attention is an arrière-garde,
우리는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not an avant-garde.
아리에르-가르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It not particularly elegantly staggers behind what it perceives,
이것은 의식하는 것을 주춤주춤 따라오지 않으며
it strives to memorize certain parts,
부분부분의 기억을 추구하고
despairing at the challenge of a culture fraudulently built on "memory" and "history",
부정하게도 유령이나 공포감 기억과 역사로
arranging itself with ghosts and spectres.
가꾸어진 문화에 대한 유감을 가집니다.

In his groundbreaking essay "Obliscence - Theories of Forgetting 
and the Problem of Matter" (1946), memory researcher Geoffrey Sonnabend wrote:
기억 연구학자 제프리 소나벤드는 그의 1946 대작인망각
잊어버림과 물질의 문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We, amnesiacs all,
기억상실증 환자 우리 모두는
condemned to live in an eternally fleeting present,
항상 우리를 지나치는 현재를 살도록 저주받았고
have created the most elaborate of human constructions.
인류 존재 아래 가장 정교한 장치를 만들게 되었다
Memory, in order buffer ourselves
기억은 반복할 없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에 반하여
against the intolerable knowledge of the irreversible passage of time
and the irretrievability of its moments and events." 
우리가 있도록 부추긴다.

Sonnabend believed that long term or distant memory was illusion,
소나벤드는 장기기억은 거짓된 환상이라 믿었지만
but similarly he questioned short term or immediate memory.
단기적 기억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곤 하였습니다.

On a number of occasions, Sonnabend wrote "there is only experience and its decay".
여러 그는경험과 그것의 부패가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By which he meant to suggest that what we typically call short term memory is, in fact,
이것은 우리가 흔히 단기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our experiencing the decay of an experience. 
사실 경험의 부패를 경험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In light of such theses that have become quite popular in memory research,  
이런 기억의 연구에 비추어
Douglas Park's reading-out of long rows,
더글라스  파크이 선보이는 문장 읽기,
of successions of formulaic expressions
지난 세기에 대담한 일부 과학자들이평범하다고
from what some scientists were audacious enough to call "normal language" in the last century,
정형화된 표현의 잇따름 등은
have more to offer than a lugubrious parade of notions acquired, perceived and processed.
그저 그가 깨닫고 가공한 생각을 우울하게 늘어놓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By his seemingly infallible choice of "power words",
그는 완벽한 단어 선택을 하였습니다
bureaucratic words that could resound from some British postwar educational flick on 
social hygiene,
전쟁 영국의 사회적 청결 교육에서 따온 같은 관료주의적 단어들,
by his speculative verbal constructions, and especially by their painstakingly concentrated 
arrangement in sounding sequences,
위험한 구어 표현, 소리의 흐름에 집중된 정렬 방식 등으로,
we are able to experience fundamental properties of language and communication,
우리는 언어와 소통에 대한 근본적인 틍성을 경험할 있습니다.
and what's more, we feel language's "lie of truth" at every turn that his vocal chords, 
his tongue, his lips, his teeth, his resounding and twitching body tells us.
뿐만 아니라, 그의 목소리, , 입술, 이빨의 움직임, 소리의 변화, 몸의 뒤틀림 
등으로 언어의 사실에 대한 거짓말 있습니다.
I think that is something. It is something that matters to me.
굉장한 것이죠. 저에게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But does it matter? How does it matter?
그렇지만 정말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어떻게?

I feel we cannot survive without the knowledge that Douglas Park turns our attention to 
(even if he does not really "convey" it or "explain" it).
더글라스 파크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발상이 없이 우리는 살아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가 우리에게 실제로 설명해 주지 않을지라도 말이죠)

We also cannot survive with it, maybe not even live with it, as long as we remain
우리는 언어의 잘못된 약속과 그가 말을 이어갈수록 감각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집중해서는
-      as he does in such an exemplary fashion – fixated on the continuously broken promise 
of language, the perceivable disappearance of sense as he speaks, as we speak, as it were.
더글라스 파크가 보여주듯, 이것 없이 수도, 이것과 함께 수도 없습니다.

To me, his speech and his speaking matter, inasmuch as it is profoundly excited,
제겐 그의 스피치가 매우 흥미로운데,
as it is agitated beyond the rhetorical calculation of effects.
효과의 수사적인 계산을 넘어서기 때문이죠.

Douglas Park audible (and visibly) subjects himself to the bitter law of deceit –
더글라스 파크는 시각과 청각적으로 속임수의 법칙에 질문을 던집니다.
that is not everything of language, but that is always present in it.
속임수는 언어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항상 존재하죠.

Moreover, Park's voice is not only phatic or phonic, it is also plastic.
더구나 더글라스 파크의 목소리는 의례적이거나 발음상의 언어를 다루는 뿐만 
아니라 조형적입니다.

No, there is no "Man inside his Mouth", but inside him,
그의 속에 다른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니고,
there is a curious appreciation of the faucal space,
목구멍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서
we are not just led to believe that in some weird paragone he is joining together 
speech and sculpture.
그가 그냥 이상하게 스피치와 조각작품을 합쳐놓은 것은 아니라고 믿게 됩니다.

With the resonant matter that is his body, by chiseling away vibrant air inside his mouth,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몸을 이용하거나, 속의 공기를 내뿜거나
by reacting within the experiential radius that we tend to screen out 
– omnipresent inexorable soundworld –  
우리가 흔히 무시하는 냉혹한 소리의 세계에 실험적으로 반응하거나
the silence as freedom from one's intentions that John Cage keeps striking us over the head with,
케이지가 계속 강조하는 침묵으로서의 자유를 이용하여
Park leaves us with a refreshed sense of doubt.
더글라스  파크는 우리에게 새로운 논쟁점을 펼칩니다.
that may only last for seconds, but that resonates also in not-so-conscious portions of 
our minds and bodies, their matter.
수초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던 몸과 마음에 울려 퍼집니다.

I have read Douglas Park's texts like the letter of a promising new acquaintance
더글라스  파크의 텍스트는 제게 실험적 예술의 세계에서
in the field of experimental artistic practices.
미래가 밝은 친구가 보내는 편지와 같이 다가왔습니다.

I want to send Douglas an answer,
더글라스  파크에게 답장을 보내고 싶습니다.
not knowing if my reading of his works is not a failure.
제가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이 실례가 아니길 바랍니다.

When I was staying in Seoul for some months in 2009,
2009 서울에서 거주할 당시 저는
I brought a buzzing pile of difficult text with me, planning to translate them into German.
독일어로 번역할 복잡한 텍스트를 가지고 왔었습니다.

They were texts by one of the few remaining original proponents of Minimal Art, Robert Morris –
세상에 얼마 존재하지 않는 로버트 모리스가 직접 미니멀 예술에 대한 
제안서였습니다.
who was and still is really much more than that.
그는 예나 지금이나 그보다 더한 존재지만요.

Which is perhaps the reason why also Douglas Park has referenced him extensively.
그래서 더글라스  파크가 로버트 모리스를 자주 언급했는지 모릅니다.

I warmly recommend to re-read Morris's writings today.
모리스의 글을 읽길 권해드립니다.

I cannot begin to explain how meaningful I think especially his poetological remarks
특히 그가 시적으로 표현한 현상론이 얼마나 제게 의미있는지
on the "phenomenology of making" appear to me.
설명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Here, as a kind of answer to the gift of Douglas Park's voice,
더글라스  파크의 목소리에 대한 대답으로
I only want to present you one small text that Morris has written in1995.
저는 여러분께 모리스가 1995년에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Morris has always doubled as an artist AND art historian,
모리스는 화가 미술학자였고
so in 1995, we find him writing an associatively paratactical text
1995년에는 그의 가장 알려진 67년작 STEAM 대해
on one of his most influential works from the 1960s, STEAM (1967).
병렬적인 글을 씁니다.

”Steam" has served Morris as much as an artwork, as a sculpture,
”Steam" 모리스의 예술적 작품, 또는 조각과도 같았죠.
as it was a far-reaching metaphorical device
많은 의미를 담은 비유의 도구였습니다.
he re-interprets verbally in the lines I have decided to read out in a recorded 
video performance piece called "Thinking like a stone".
그는 제가 비디오 퍼포먼스 ‘Thinking like a stone’에서 읽은 문장들을 재해석합니다.

The text he wrote is a fragmentary,
그가 글은 완전하지 않지만
but lively piece of applied cultural history trying to spell out
문화사의 흥미로운 작품으로
what no-one would ever expect a "minimal" artist to put into words.
미니멀한작가가 담을 없다고 생각한 것을 글로 남겼죠.

Disappointingly for many,
대단히 애석하게도
minimal artworks were as much expected to "speak for themselves"
미니멀한 작품은 설명 없이도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
as the eruptions of any too-late "abstract expressionist" working in your neighborhood.
마치시대를 잘못 타고난동네 추상현실주의 작가를 이해하는 것처럼 인식되죠.

My interest in Morris is translated here into the rhetorical device of an artificial 
speech impediment.
저의 모리스에 관한 관심은 여기서 인위적인 언어장애의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Like the antique philosopher and rhetor Demosthenes, who was born a stutterer,
말더듬이로 태어났던 고대의 철학자와 웅변가 데모스테네스가
wanted to become the greatest orator of his time, and thus tried to raise his voice against 
the crushing noise of the waves on the beach near his village to exercise his abilities,
시대 제일의 연설자가 되기 위해 파도 소리에 맞대고 목소리를 훈련시킨 것처럼
I want to pick up some matter, something material - before i speak.
저도 말을 하기 전에 물리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I worship the silence that sings like a bird,
나는 새처럼 노래하는 침묵을 찬양합니다.
I long for the Moon as it looks from the Earth.
지구에서 달이 이쪽을 보듯이 나도 달을 그리워합니다.
I need some material counterpart
나는 물리적인 짝이 필요해요.
because every body speaks lightly.
모두들 말이 가볍기 때문이죠.
Demosthenes, after practicing to outshout the waves,
데모스테네스는 파도소리를 이기기 위해 연습하고는
picked up pebbles from the beach and literally "spoke through them".
돌을 집어 그것을 통해 말했습니다.
I leave you with some minutes of matter I have gleaned from the ground as much as from 
Robert Morris.
그럼 이만 로버트 모리스와 제가 쌓아온 몇분간의 물리적 물질을 남기겠습니다.
I want to thank Douglas Park for allowing me to see this text in an entirely new way.
텍스트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더글라스  파크에게 감사드립니다.
I'm not sure if this gets through to you, but I thank you anyway.  
이것이 당신에게  전해질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감사합니다.


STEAM 
1995

The epitome of the ephemeral.
임시적인 것의 발췌
A refusal of “form” that does not, however, collapse into the sublime.
형태를 거부하나 숭고함으로 치우치지 않는
A summation and cancellation of all the clouds ever represented in art.
예술사에서 표현된 모든 구름의 요약과 무효화
A veritable Aufhebung of the cloud. (Yet perhaps a tinge of nostalgia for Turner?)
진정한 구름의 파기 (터너에게는 약간의 향수를)
An expenditure of heat: that which life itself mortgages from the sun.
생명이 태양으로부터 대출받은 열의 지출
A coldly calculated sculpture formed with warmth.
냉정하게 계산된 조각상을 채우는 온기
A monument both to Heraclitus (you can’t put your foot into the same steam twice in this work) 
and Parmenides (we will not speak of the work’s “nothingness” in the face of heat which is the 
“one” of every living thing).
헤라클라이터스 ( 작품에서는 같은 증기에 두번 다시 발을 담글 없다) 
파르메나이데스 (모든 생명체의 일부인 작품의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기념물
Let’s not forget Zeno whose arrow would never make it through this work.
작품을 절대 지나갈 없는 제노의 화살도 잊지 맙시다
Let’s not forget the ancient sacred springs bubbling up in steamy, forgotten mists –
잊혀진 증기가 가득하게 올라오는 고대의 신성한 온천을 잊지 맙시다
sites now cemented over for shopping mall.
이제는 쇼핑몰을 위해 시멘트가 깔린 자리들
Undoubtedly the archaic is celebrated in this work.
의심의 여지 없이 작품은 고풍스러움을 찬양합니다
Dig deep enough beneath the very spot on which Steam is installed and what would be found?
Steam 설치된 바로 자리를 파헤치면 무엇이 나올까?
Old pottery, broken, once polished stones from forgotten settlements.
잊혀진 곳의 오래된 자기, 부서졌지만 한때는 반짝이던 돌들
And what’s this? Montaigne’s lost collar button?
이건 뭐지? 몬타네가 잃어버린 카라 버튼?
But dig deeper still and see a broken oil lamp, a Roman bronze strigil.
약간 파헤치면 깨진 기름 등이 있어, 로마시대 동으로 만든 홈조각 장식
Go deeper, beyond any human artifact and into the earth’s crust, and heat rises.
들어가면 인류의 유물을 지나 지구의 중심으로 , 열이 오른다
Smoke and the churning innards of the grumbling gut of the earth itself belches up its 
indigestion in sulphurous clouds.
연기와 지구 속에서 나오는 트림이 소화불량 때문에 지옥불 같은 구름으로 분화한다 
Dante knew of the region.
단테는 이곳을 알고 있다
But let’s leave Christianity out of it.
일단 기독교는 내비두지
Hell, as we might recall, requires no digging, having shaped the upper layers of the earth for 
the last century.
지옥은, 기억해보자면 필요도 없이 지난 세기 지구의 위측 표면을 이루고 있었다.
Continuous smoke and fire and the scream of wars large and small have deafened us to 
Mnemosyne’s whispers.
지속적인 연기와 , 크고 작은 전쟁으로 우리는 므네모시네의 속삭임에 무뎌졌다
But steam is not smoke.
그러나 증기는 연기가 아니다
James Watt knew what to do with both when he stuffed them into his engine and 
transfixed Turner, 
who put a rabbit in front of the industrialization bearing down on it full tilt.
제임스 와트는 현명하게도 증기를 엔진에 구겨넣었고 터너를 얼어붙게 했다.
그는 산업화가 기우는 곳에 토끼를 갖다놓았다.
Watt we acknowledge with a deep bow.
와트여 그대에게 깊이 머리를 숙입니다.
But we keep his machine out of sight in the next room.
하지만 그의 기계는 옆방에 놓아두는 걸로
It is unbearable to look at.
못봐주겠다
Watt and Babbage and von Neumann do not require monuments but a moment of silence 
in which we bow our heads and grit our teeth while their grinning visages embroider the pipes 
and wires of our magnificent cages.
와트와 바바지, 뉴만에게는 우리가 묵념하며 머리를 숙이고 이를 갈고 그들의 
미소지은 얼굴이 우리의 굉장한 새장 파이프와 철을 장식하는 기념물은 필요하지 않다.
But let us for a moment step off the track down which technology hurtles with its relentless, 
terrifying momentum.
가차 없고 무서운 속도를 가진 기술의 돌진에서 잠시 걸음 물러서자.
Turn back once more to the archaic: the steam bath as purification.
고대를 다시 한번 돌아보자 : 정화로서의 증기 목욕
The Native American ritual of sweating in a steam-filled enclosure before battle.
전투 증기로 가득한 곳에서 땀을 흘리는 아메리카 원주민 의식
Not that I would dream of making claims for Steam along such lines.
물론 내가 Steam 대해 이런 것에 관련한 평을 내릴 생각은 아니지만
I only want to distinguish steam from smoke, eros from thanatos, energy from entropy, 
warmth from third degree burns (“Distinguish there, Polonius, that cloud that looks very like 
a camel from that other, that looks very like a mushroom.”)
나는 단지 증기와 연기, 에로스와 타나토스, 에너지와 엔드로피, 온기와 3 화상을 
구분하고 싶을 뿐이다 
(“여기 보게, 폴로니우스, 구름은 다른 것과 달리 낙타와 매우 유사하군
저건 버섯 같고”)
Let’s not forget the stones, thousands of them have, since the Cambrian, lain in rivers submitting 
to water’s infinitesimal rate of sculpting.
캄브리아기부터 강의 흐름에 순종하며 극소의 다듬음을 거치며 깔린 수천개의 돌들을 
잊지 말게
Leonardo marveled at the process.
레오나르도는 과정에 흥분하곤 했다
How many miniature Brancusi ovoids have been dredged up here to occupy this geometric plain 
through which Steam percolates?
Steam 스며드는 기하학적인 계획을 차지하기 위해 미니어쳐의 브랑쿠시 타원이 건져 
올려졌겠는가 ?
These stones form the base of our monument of Steam.
돌들은 Steam 기념물의 기초를 이룬다.
But perhaps Steam is after all an anti-monument.
하지만 어쩌면 Steam 결국 반기념물일지도 모른다.
Perhaps it is a kind of monumental anit monument to the shrinking cultural space of art –
어쩌면 자꾸만 줄어드는 예술의 문화적 공간을 향한 아니트 기념물적인 
기념물인지도 모른다-
a space that tends to evaporate in the face of that lurch to the “right” that would validate only
 the useful and deny the exhilarating excess of all metaphor, the very site of art.
그렇게 쓸모있는 것만 인정하고 비유, 예술 공간의 홍수를 부정하는옳은것들에 
의해 휘청하며 증발하는 공간
After all Steam is just a lot of hot air; a towering babble of hissing, wordless vapor;
결국 Steam 그냥 허파에 바람 것이다; 쉿쉿거리는 무언의 증기 ;
a physical-visual-thermal sigh;
물리-시각적인-온기-있는 한숨;
a sweet, warm, mute breath wrung reluctantly from Watt’s engine of work.
와트 작품의 중요한 곳에서 마지못해 피어오르는 달고 따뜻한, 무언의
A damp, incoherent mumble of the delights of evanescence and multiplicity;
덧없음과 다양성의 환희의 축축하고 앞뒤가 맞는 중얼거림
a gaseous, upward rush celebrating the contradiction of an object made from thin air – 
얕은 공기에서 만들어진 것의 모순을 기리는 공기같은 상향의 뿜어짐
an object that upon being entered confers a white, enfolding blindness,
그곳에 들어서는 물체는 눈부신 빛을 수여받고
the damp frisson of a vaporous claustrophobia, and the kiss of warm stones against the foot.

스며드는 듯한 밀실 공포증의 축축한 전율과 따뜻한 돌이 발에 닿으며 키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