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라시즘’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 킴킴갤러리와 그의 친구들
이상길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1.
그는 나의 오랜 친구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동안 자주 만났다거나 서로의 속사정을 털어놓고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굳이 따져보진 않았으나, 우리가 실제로 만난 횟수라고 해봐야 줄잡아 수십 번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저 ‘구면’이라거나 ‘지인’이라고 써야 할까. 하지만 난 그를 예전에나 지금이나 친구로 생각한다. 그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정이 꼭 수다스러워야 할 필요는 없다. 벤야민은 어디선가 자기와 아도르노 사이의 우정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만 지속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약간 비틀어, 나는 그와 나 사이의 우정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지속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남들은 너무 데면데면하다고 여길 지도 모를 이 관계가 내겐 무척 소중하다.뒤늦게 깨달은 점인데, 우리는 ‘어릴 때 친구’인 것이다. 20대 중반에 서로 알게 됐으니, 나름대로 머리 크고 나이 들어 만났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구태여 그 시절을 어렸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제 우리가 그것을 20년 전 일로 회상해야 하는 나이에 들어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때 우리 모두가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한창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그 과정의 어떤 단계에서 그 ‘사람’은 ‘연구자’, 또는 ‘예술가’라는 사회적 이름을 부여받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제도적 정체성 규정의 절차에 따르는 미래를 크게 의식하며 지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지금보다는 훨씬 더 무정형의 상태로, 단지 바쁘게 배우고, 만들고, 움직이고 있었을 따름이다.
우리가 유학했던 1990년대의 파리는 멋진 곳이었다. 1990년대 초반, 실업률이 15%를 넘나들고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은 점점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민사회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이어 무너지고 보스니아 내전이 벌어졌던 때라, 파리는 난민, 이민자, 망명객들로 들끓었다. 길거리에는 구걸하는 거지와 집시, 노숙자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그 무질서하고 어수선한 느낌이, 적어도 이방인이었던 내게는, 묘한 자유와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1995년에는 좌우동거정부의 복지제도 축소에 맞선 총파업이 일어났다. 기약 없는 교통대란이 이어졌고, 정장 차림에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낯설어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노동계가 승리했고 시민들은 환호했다. 그들 틈에 우리도 끼어있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사상계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던, 뛰어난 지식인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었다. 레비-스트로스, 부르디외, 데리다, 보드리야르, 투렌 등등. 그들의 신간이 나왔고, 종종 논쟁이 벌어졌다.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선 그들의 인터뷰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때로 그들의 강의나 강연에 직접 참석할 기회도 있었다. 그 ‘좋았던 옛 시절’은 우파 정권이 들어서고 이민법이 야박해지고 극우정당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지지율이 올라가면서, 그리고 가타리, 드보르, 들뢰즈, 료타르 같은 이들의 부고기사가 차례로 쌓여가면서 조금씩 저물어갔다. 사실 잔치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우리는 너무 늦게 도착한 초대장을 손에 쥐고서 제 흥에 겨워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최영미) 그와 나는 ‘문민정부’가 겨우 첫걸음을 내딛고 ‘프랑스 사상’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이국에서 날아온 유학생이었던 것이다.
2.
언젠가 그의 집에 놀러갔던 날, 나는 그즈음 막 서점에 깔린 부르디외와 한스 하케(Hans Haake)의 대담집을 선물로 챙겼다. 책을 받아들고는 활짝 웃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무언가 간단한 것들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어쩌니 ‘시뮬라시옹’이 저쩌니 하는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다. 대단한 지식은 없어도 진지함만은 차고 넘치는 20대 특유의 대화가 그렇게 중구난방 이어졌다. 그가 보드리야르에 흥미가 있다고 지나치듯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 인상이 오래 남아서였는지, 그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졸업작품전에 갔을 때나, 그의 최근 작품도록 <쓰바 레알Unfucking Real>(2012)을 보았을 때도 난 보드리야르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물론 그는 이런 류의 ‘해석과 참조의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 역시 예술가의 수학 시절 흔히 있을 법한 지적 관심을 어떤 영향의 계보 구축에 동원하면서, 얼치기 평론가 흉내를 내볼 요량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볼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우리가 이십년 전 주고받았던 이야기의 희미한 추억이 용수철 달린 악마인형처럼 불쑥 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일상의 사물과 그것을 둘러싼 구체적 공간에 대한 그의 각별한 취향, 그리고 쾌활하면서도 집요한 변형과 재구성의 시도를 앞에 두고, 나는, 예를 들면, 보드리야르의 ‘가제트(gadget)’ 같은 개념을 곱씹게 된다. “소비사회에서의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자 “기호로서의 기능을 위해 객관적 기능(도구성)을 상대적으로 없애버린 사물”로서의 가제트.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가제트는 일상생활을 스펙터클로 만들어버리는 체계의 논리의 일부이며, 그 결과 이 논리는 사물의 환경, 더 나아가서는 인간적 · 사회적 환경 전체에 인공적 성격 및 속임수 성격, 그리고 무용성을 덧붙인다. 가장 넓은 의미의 가제트는 사물이 본래 갖고 있는 목적성 및 유용성의 전면적 위기를 사물의 유희성의 양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가제트는 장난감이 아이들에게 주고 있는 상징적 자유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도달할 수도 없다.” 근본적으로 그가 소비사회의 가제트에 보내는 시선에는 경멸 아닌 매혹,또는 아이러니가 담겨있는 듯싶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아마도 가제트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슬쩍슬쩍이나마 시시때때로 폭파할 수 있는 잠재력을 탑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가제트와 장난감 사이 어디쯤에 놓일 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지고 놀 수 없는, 그러니까 유용성을 상실한 장난감이라는 점에서 가제트와 닮았지만, 그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어떻게든 재맥락화가 가능한, 한마디로 상징적 자유에 도달한 가제트라는 점에서는 차라리 장난감에 가까운.
3.
파리에서 그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기억한다. 퐁피두센터 근처 어떤 극장 앞, 길게 늘어선 관객 줄 가운데 영화를 보러 온 내가, 혹은 그가 서 있었다. <오프닝 나이트>, 아니 <영향 아래의 여자>였던가, 카사베츠의 영화가 걸려있었던 것 같다. 예정에 없던 잠깐 동안의 마주침이었지만,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 때는 그것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경기도 미술관에 라리사 효스(Larissa Hjorth)의 전시회를 구경 갔을 때였다. 거의 10여년 만이었을 것이다. 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가진 기대치 않은 재회였던 탓에 우리는 무척 놀랐고 그만큼 기뻐했다. 이후 가끔씩 그는 나를 이런저런 전시회에 초대했고, 나는 친구 집에 놀러가듯, 시간이 맞을 때, 또는 마음이 내킬 때 부담 없이 그와 관계된 전시회에 들리곤 했다. 그가 내게 더글라시즘(Douglasism) 페스티벌에 참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 온 것은 올 봄의 일이다.
두어 차례 메일을 주고받은 우리는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 만났다. 갤러리 한 구석에서 로베르트 에스테르만(Robert Estermann)의 <사색적 평면(Speculative plane)>이 하얀 혓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내게 더글라시즘의 기획의도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무언가 함께 할 수 있으면 재미있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담아. 그는 아마도 강연이나 비평의 형식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싶다. 그 제안을 회피하는 동시에 내 나름의 방식으로 수락한 결과가 바로 이 글인 셈이다. 그 제안을 회피한 이유는 자명하다. 난 비평가가 못 된다. 전형적인 범주의 미술비평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이 내겐 없다. 너무 높은 곳에 주렁주렁 열린 포도송이 아래를 지나가는 여우 식 심보에 불과하겠지만, 텍스트 중심적인 예술비평은 딱히 내 관심사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예술과 연관된 비평 비슷한 에세이를 몇 편 쓴 적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작품을 빌미삼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또 마침 그렇게 할 수 있어서였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내가 쓰는 글은 모호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더글라시즘과 관계없진 않으면서도, 그것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비평은 딱히 아닌. 사실 그의 더글라시즘 페스티벌 구상을 들으며, 난 그 밑에 깔려 있는 몇몇 모티브에 관해 말해보고 싶어졌다. 그가 운영하는 킴킴갤러리는 왜 그러한 작업을 계획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 나름대로 추론해간다면, 이는 결국 킴킴갤러리, 그러니까 그에 관해 말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더글라시즘 페스티벌에 개입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더글라시즘에 대한 내재적이고 미학적인 사후비평이 아니라, 지극히 외재적이며 주변적인 사전인상기, 혹은 영리한 홍보문. 이것은 킴킴갤러리가 표방하는 ‘비정규 마케팅(unconventional marketing)'에도 잘 맞아떨어지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4.
그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문화사조(-ism: 정신적 정치적 문화사적 활동이라는 뜻에서)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상대적으로 경직되고 상업적인 문화시대인 21세기에 킴킴갤러리가 서울에서 여는 더글라시즘 페스티벌은 작가인 더글라스 파크(Douglas Park, 1972년 영국생)를 중심으로 1990년대 초부터 진행되어 온 여러 나라 작가군들의 교류, 여기서 파생된 작품 수백 점을 연구, 발표하는 기획이다. 더글라시즘은 더글라스 파크가 참여하고, 그를 촉매로 한 작품들의 다양성, 개방성의 극대화가 일으키는, 정치적 뜻보다 더 강한 의미로서의 문화적 이즘(-ism)을 실험한다. 더글라시즘 페스티벌은 서울 각지의 전시장, 대안공간, 상영관, 문화원, 공공장소에 이르는 다양한 장소에서 열릴 예정이며, 미술, 영화, 출판, 음악 등의 여러 장르를 망라하고, 작가 30여명, 국내외 예술기관들이 참여하는 페스티벌이다. 킴킴갤러리는 더글러스 파크라는 인물과 그가 속한 문화를 다소 거리가 먼 서울에서 다양하고 열린 내용의 페스티벌로 개최한다.” 킴킴갤러리는 그가 2008년부터 실험해온 새로운 유형의 ‘갤러리-작업’이다. 그것은 일정한 공간을 갖추지 않은 채 기획의도에 따라 그에 맞는 장소와 전시 형식을 취하면서 현대미술의 구조에 개입한다. 내가 킴킴을 굳이 그의 ‘갤러리-작업’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작가 선정과 전시 기획, 그리고 ‘장소’의 선택에서 예술에 대한 그의 시선, 감각, 취향, 한마디로 어떤 정서적 태도(ethos)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글라시즘에 관해 더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초여름 신촌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자기 키를 훌쩍 넘는 작업용 종이를 돌돌 말아 안고 있었다. 우리는 따가운 저녁 햇살을 견디며 천천히 걸었고, 차갑고도 질긴 냉면을 같이 먹었으며, 심심하게 앉아 차를 마셨다. 그는 몇 해 전 런던에서 머무는 동안 더글라스 파크를 알게 되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나로서도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예를 들면, 미술계에 흔치않은 노동계급 출신이면서 예술사에 남다르게 해박한 지식을 갖춘 전방위 예술가이고, 다방면의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그랬다. 그에 따르면, 더글라스 파크는 스스로를 “시각예술가, (대부분 예술과 관련된 문학적 산문과 비평문을 쓰는) 작가, 큐레이터”라고 소개하는데, 실제 그가 하는 일은 배우, 나레이터까지를 망라한다. 이 작가가 평소에 주로 하는 일은 카페에서 자작 텍스트를 낭송하는 퍼포먼스다. 그는 지난 20년간 숱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창작에서 부수적이거나 보조적인 역할을 맡는 식으로 많은 작업을 함께 해왔는데, 정작 자신이 중심에 있었거나 중요하게 인정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 작가가 수십명의 다른 작가들과 공조한 작품 200여 점을 한데 전시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동일한 식자공의 손을 거쳤다는 이유로 이질적인 저자의 책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한다거나, 특정한 단역 전문배우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장르나 스타일이 제각각인 영화들을 한 묶음으로 상영하는 행사처럼 흥미진진한 시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예술사회학자 하워드 베커(Howard Becker)는 예술세계가 무엇보다도 협력적 연계(cooperative links) 속에서 복잡한 노동분업에 따라 이루어지는 집단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바 있다. 시 쓰기 같이 상대적으로 독자성이 강한 예술행위조차 출판을 겨냥한다면 편집자라든지 디자이너, 인쇄공 등,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영화나 공연처럼 통상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접속하고 협업하지 않으면 제작 자체가 어려운 예술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현대미술은 점점 더 영화나 공연을 닮아간다. 물론 노동분업 과정에서도 ‘핵심 활동’을 맡는 ‘예술가’가 있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조력자 내지 보조인력(support personnel)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핵심활동의 수행자만이 예술가나 창작자의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거나 미학적 결정을 온전히 주도한다거나 아니면 예술작품의 성취를 독점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는 일종의 사회적 고정관념 내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이러한 관점에서 그동안 이리저리 흩어져 제각기 다른 ‘작가’에게 속해있었던 다양하고 이질적인 작품들이 더글라스 파크라는 ‘보조인력’을 꼭짓점으로 이어진다면 과연 어떤 미학의 계열이 새롭게 가시화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것이다.
5.
그는 내게 더글라스 파크가 지금껏 유명해질 수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형체 없는(intangible) 작품’을 생산해왔기 때문이라고 일러 주었다. 내가 처음 문화생산의 물질성이라는 문제를 머릿속에서나마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된 것은 유학시절 노베르트 엘리아스(Nobert Elias)의 전기적 인터뷰를 읽으면서였다. <모차르트-천재의 사회학>이라는 저서를 유작으로 남긴 이 독일 사회학자는 1938년과 1939년에 <문명화 과정> 1, 2권을 출간했다. 한데 훗날 자신의 명성을 전 세계에 떨치게 해줄 이 대표작들의 출판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엘리아스는 그 책들을 아버지의 재정적 도움을 얻어, 그나마 스위스의 한 출판사에서 간신히 출간할 수 있었다. 더 씁쓸한 경험이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연히 그 출판사를 방문했을 때 엘리아스는 사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당신 책들 때문에 내 지하창고가 꽉 차있습니다. 그것들을 헐값에 처분해도 될까요? 아무도 그 책들을 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들’이 팔리지 않은 채 어느 외진 곳 창고에 잔뜩 쌓여있는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상상해본 적 없던 내게 인간 ‘정신’의 소산인 책이 또한 얼마나 지독하게 ‘물질’인지를 일깨워주었다. 예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의 생각이라면, 그것은 또 우리가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의 사물이기도 하다. 더욱이, 작가나 학자에게 책이 그렇듯이, 예술가에게 객체화된 작품은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의미할 것이다. 예술의 ‘불멸가능성’, 그리고 ‘환금가능성’.
사물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고 남는다. 반면 더글라스 파크가 벌이는 즉흥 퍼포먼스처럼 물적 실체로 고정되지 않은 예술은 금세 덧없이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설령 그것이 작가의 의도와 계산에 따른 것이라 해도, 실제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물질이야말로 금방 휘발해버릴 위험이 있는 미술작가의 사유를 형상 안에 정박시켜주는 미학의 닻이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예술작품의 현전과 견고한 물질성이 불러일으키는 영속성에 대한 기대야말로 헛된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예술가가 죽고 나서 얼마 뒤면 대부분의 작품이 쓰레기로 전락하고, 50년이 지나면 작품들 가운데 90%가 소멸한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말이다. 한편 물질은 적어도 아직까지는-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 수 없지만- 예술이 환금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술작가가 물리적 작품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제적 수입의 기반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는 어쩌면 작품의 불멸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가난은 예술가 자신이 끊임없이 온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삶의 여건이기에 그렇다. 오래전에 내가 만난 적이 있는 한 설치미술가는 상당히 유명한 작가였는데도 다음 작품의 제작비용을 마련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그는 예술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이래 돈 걱정과 이사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일반적으로 예술노동자는 같은 연령대의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평균 소득수준이 낮고, 실업률 · 빈곤률이 높다.고용은 대개 자가고용, 프리랜서, 비정규직의 형태를 띠다 보니, 수입의 변화도 심하다. 그는 복수의 직업을 갖든지 아니면 사적(배우자, 가족, 친구) ․ 공적(재단, 기업, 정부) 후원을 받아 생활을 꾸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사회학자나 경제학자들은 그러한 빈곤의 원인으로 승자독식 현상이 강한 예술시장의 특성이라든지, 예술가의 자만심, 자기기만, 위험감수 성향 등을 꼽는다. 이유야 어쨌든, 이처럼 경제적으로 힘든 환경에서 예술가에게 ‘팔 물건’조차 없다는 것은 비밀이 없다는 것만큼이나 쓸쓸한 노릇일 터이다. 그럼에도 예술가가 계속 자청해서 ‘팔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면, 이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내 질문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가난하지만 호사스러운 것”이라고. 이 때, 호사스럽다는 것은 예술가가 경제적 곤란에도 아랑곳없이 부릴 수 있는 ‘정신적 사치’를 가리킬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상징적인 보상(동료들로부터의 인정, 사회적 명예와 존경), 또는 내적이며 심리적인 보상(만족감, 자부심, 사명감)을 추구하는 식으로 말이다.
6.
큐레이터 클라우디아 페스타나(Claudia Pestana)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킴킴갤러리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재창조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개별 예술가의 작업을 장소, 그리고 전시방법과 잘 맞춤으로써 세 요소를 조밀하게 연결시키는데, 이는 따분한 생산성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기술과 방법의 이전을 통해 예술가에게 다시 힘을 북돋워주기 위해서이다.” 정서영, 성낙희와 성낙영, 제프 게이블(Jeff Gabel), 로베르트 에스테르만 등이 그의 이러한 작업에 동참했고, 더글라스 파크가 그 명단에 새로이 이름을 올렸다. 나는 이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니까 킴킴갤러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예술가들을 선택하는가? 내 질문에 그는 약간의 망설임과 더불어 “예술가들의 예술가가 아닐까” 하고 반문했다. 대중보다는 동료들을 의식하며 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예술가. 자신이 속한 전통에서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기를, 또는 옆으로 영영 샐 수 있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예술가. 그러한 예술가 부류는 무엇보다도 그가 말한 의미에서 ‘호화롭게 사치하는 태도’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한데 어떤 사회학자라면 ‘상징자본의 추구 성향’이라고 간단히 뭉뚱그려 규정할 법한 이 태도는 좀 더 섬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술가가 ‘단기적으로’ 경제자본의 획득을 희생하는 대신, ‘장기적으로’ 상징자본의 축적을 겨냥하는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그 태도의 요체가 예술가의 ‘초단기적인’ 혹은 ‘즉시적인’ 경험 지향성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창작행위의 결과물로서 작품,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줄 경제적 수입에 대한 기대는 상징적 보상에 대한 기대보다야 ‘단기적인’ 것일 수 있어도, 작업 중인 예술가에겐 그래봤자 ‘장기적인’ 지평에 놓이는, ‘한참 먼 훗날’의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예술가’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그리하여 그들의 창작행위를 진정으로 추동하는 것은 상징자본의 추구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창작과정에서의 사회적 교환과 상호작용을 통해 경험하는 ‘즉각적인’ 감정과 만족일지도 모른다. 더글라스 파크같은 예술가들이 물리적 ‘작품’의 생산을 일정하게 포기하고 또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이 역시 그들이 작품의 생산과정 속에서 이미 스스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역할이 크고 작은 것과 관계없이 창작을 위해 다른 이들과 협업하는 과정, 그 수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수용자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과정,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과 장소와 분위기를 매개하며 무형의 작품을 구축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예술가들의 예술가’들이 작품의 영속성과 환금성을 부차적인 어떤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거나, 예술에 대한 헌신과 몰입을 더욱 각별히 드러내는 이유도 그와 같은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다시 그들이 서로 간에 동료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정서적 토대로 작용한다. 동일한 자원-경제자본이든 상징자본이든-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는 데서 나오는 직업적 동류감이 아니라, 각기 다른 개인들이지만 유사한 가치-새로운 경험이든 감정이든 창작이든-를 지향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하는 연대감이 그것이다. “왜 더글라시즘을 구태여 서울에서 개최해야 하는가?” 누군가 그에게 물어온다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예술가들의 예술가’들에게는 작가나 작품의 국적, 지리적 경계, 문화적 소속 따위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그들에겐 예술의 가치에 대한 신념과 예술세계의 보편적 확장 가능성에 대한 상상, 말하자면 일종의 결연한 미학적 국제주의가 있다고.
7.
그와 나는 오랜 친구다. 나는 유학시절 그로부터 예술을 배웠다. 물론 그가 내게 무언가를 직접 가르쳤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내게 준 이런저런 영향을 의식조차 못할 것이다. 하지만 미술에 호기심은 없지 않았으나 작가나 작품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던 내게 그와의 교분은 미술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들어준 소중한 계기였다. 그와 그의 친구들을 따라 에콜 데 보자르를 드나들며, 단편적이나마 그들의 작업과정을 지켜보며, 그들과 커피를 마시거나 잡담을 나누며, 또 그들에게 자극받아 전시회를 구경 다니며 나는 학교에서 들었던 미학이나 사회학 강의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인 문제를 화두로 삼거나 사회적인 발언을 드러내어 시도하는 작가는 아니다. 1980년대에도 그는 학생운동에 거리를 둔 채 자기 작업에만 전념한, 전형적인 ‘미대생’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가 자신의 교육배경과 작품 사이의 관계에 무심코 사회학적 촉수를 들이댔을 때, 그 의외의 직관력에 내심 놀랐다. 그는 내게 자신이나 자신의 동세대 작가들이 모두 “결국엔 배운 것을 만들고 있어서 시시하다”고 말했다. ‘비정치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흔히 갖기 쉬운, 예술가의 ‘자유의지’와 ‘창조적 재능’의 이데올로기를 그는 내면화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유학을 오고 나서야 이른바 ‘동시대(contemporary) 미술’을 제대로 접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파리, 뉴욕에서 런던, 베를린, 뮌헨 등지로 유학의 경로는 변화했으며 유학생들 또한 많아졌다. 하지만 그들이 국내에서 자기를 가르친 선생의 추천에 맞추어 유학을 가고, 국내에 돌아와선 유학한 곳의 선생에게 배운 대로 작품을 만드는 패턴은 여전하다.
아마도 그의 사회학적 관찰은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작업에 몰두하는 예술가로서 그가 성찰의 어느 단계에서 예술의 ‘사회적’ 차원에 눈을 돌리게 되었듯이, 예술의 ‘사회적’ 존재양식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로서 나는 점점 더 그것의 ‘개인적’ 차원에 시선을 주게 된다. 예술사회학자 피에르 솔랭(Pierre Sorlin)은 예술가의 본성, 재능, 천재성 같은 낡은 관념들을 거부하면서도, ‘사회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예술가와 창작행위의 어떤 면모를 가리키기 위해 ‘특이성(étrangeté)’이라는 용어를 쓴다. 특이성은 예술가들만이 가지는 속성은 아니다. 이를테면, 엄청나게 빨리 뛰는 사람, 몇 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 등에게도 특이성이 있다. 인간의 이 낯선, 이상한, 기묘한, 특별한 부분은 ‘사회적인 것’을 빠져나가고 모든 규칙성을 무시하며 어떤 법칙으로도 감싸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솔랭은 이렇게 단언한다. “사회학은 예술에 대한 관계의 명백히 집합적인 양상들을 규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창작이 구사하는 매력은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의 의의는 어쩌면 외적인 분석과 해체의 막다른 지점에서 더 이상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예술의 진정한 매력을 대면하게 해준다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끼질하다/향기에 놀랐다네/겨울나무 숲”(요사 부손)
그는 킴킴갤러리를 매개로 예술가들 사이에 “지금은 잊힌 우애의 공동체”를 복원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더글라시즘의 국제주의 역시 아마도 그러한 의지의 일환일 것이다. ‘구축’이 아니라 ‘복원’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그를 보며, 나는 “그렇다면 예전에는 그런 것이 정말 있었단 말인가”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질문을 내가 실제로 입 밖에 냈는지, 아니면 마음속으로 삼켰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답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도 그가 아무 말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내가 잊어버렸기 때문인지 이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 “우애의 공동체”에 관한, 되살릴만한 어떤 기억과 경험이 있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위한 여정을 계속해나가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장 영역과 후원 영역 모두에서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되고 상업화의 압박이 날로 심해져만 가는 미술계에 그러한 이상이라니, 과연 실현가능한 일인가? 공간도 없는 갤러리, 상업성도 없는 작가들 몇 명이 ‘예술’을 탐하며 모였다 흩어졌다 운동한다고 해서? “나비의 날개/몇 번이나 넘는가/담장의 지붕”(마쓰오 바쇼)
Oct. 2013
Seoul